주체103(2014)년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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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리》우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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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적을 찾아 40여년
  민족의 슬기와 력사는 문화유산을 통하여 후세에 전하여집니다. 그러나 그 민족문화유산들을 찾아내여 빛내인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선고고학계에 널리 알려져있는 평양시민족유산보호관리소 학술원 리정남은 말합니다.
  《제가 가치있는 연구자료들을 내놓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성과의 비결이 과연 무엇인가고 묻군 합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고고학자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타고난 재능으로만 고고학을 하는것이 아닙니다.
  고고학은 지식이나 재능에 앞서 사랑으로 하는것입니다.》
  그 사랑은 바로 자기가 태를 묻고 자라난 조국과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안고 그는 40여년동안 국보적의의를 가지는 유적유물들을 80여건이나 발굴고증할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4년전 조선에서 전방후원형무덤이 수많이 발굴되였다는 소식은 동방의 력사학계를 떠들썩하게 하였습니다.
  리정남이 바로 그 주발굴자였습니다.
      전방후원형무덤은 앞부분은 네모지고 뒤부분은 둥글게 생긴 무덤형식입니다.
  발굴당시까지만 해도 그것은 일본에서 3세기경부터 발생한 무덤형식으로 인정되여 일본의 고대문화를 대표하고있었습니다.
  조선에서 발굴된 전방후원형무덤은 BC 277년부터 AD 668년까지 존재한 고구려건국초기의것으로서 일본의것보다 200~300년 앞선것이였습니다.
    현지확인을 한 일본의 고고학자들과 력사학자들은 자기들이 자랑하던 고대일본의 무덤들이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것이 틀림없다는 엄연한 력사적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후에도 리정남은 력사학계를 놀래우는 또 하나의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후 궁성으로 리용한 안학궁이 《황궁》이였는 사실이였습니다. 학계에서 진행된 론의들은 이 주장이 옳으며 고구려가 그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은 당당한 황제국, 동방의 천년강국이였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명백히 증명해주었습니다.
  그는 유적유물발굴사업뿐아니라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사업에도 참가하여 큰 기여를 하였으며 수십종에 달하는 력사관련도서들과 수백건의 론문들을 집필발표하였습니다.
  고적을 찾아 40여년, 바로 그것은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슬기로운 문화를 빛내이려는 애국의 마음으로 이어져있었습니다.
《조선의 소리》조선어방송편집부     www.vok.rep.k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