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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옥은 콤퓨터에 병력서를 기입하고있었다.
타자가 빠르고 정확한 그는 과의 병력서를 거의 혼자서 기입하군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엔 마음이 편안치 않아 그런지 정신을 집중할수가 없었다. 빈번히 오자가 생기는가 하면 문자변환을 하지 못하고 건을 눌러 병명란에 라틴어대신 조선어자모음이 무질서하게 생겨나기도 했다. 신경질적으로 거꾸로지우기건을 두드려대던 수옥은 건반을 밀어버렸다.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아침에 그는 언니의 부탁대로 한정국을 만나기 위해 과장실문을 두드렸다. 마침 그는 방에 있었다. 량수책상앞에 앉아 무엇인가 쓰고있던 정국이 머리를 쳐들었다.
《무슨 일이요? 퇴직문제때문이면 출장간 당위원장동지 가 돌아온 다음 봅시다. 내 좀 바쁘구만.》
그런 일이 있었다. 사실 의사란 가정부인들에게 힘든 직업중의 하나이다. 왕진, 회진, 집중치료, 환자호송 … 남아돌아가는 시간이 없었다. 소학교와 유치원을 다니는 향순이와 대철이의 뒤시중도 할래 수산성에서 근무하는 남편의 뒤바라지를 잘하재도 그래 시간이 모자라서 늘 전전긍긍하던 그는 며칠전에 과장에게 그런 제기를 했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
수옥은 말끝을 흐렸다.
정국은 의아한 눈길로 수옥을 건너다보았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한담.)
면구스럽기 그지없는 몇초가 흘러가자 수옥은 머리속에 순서없이 떠올랐던 자기같지 않은 애매하고 아리숭한 말마디들을 모두 밀어버리고 직방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한다구 욕하진 마십시오. 과장선생님 은 왜 아직도 가정을 이룰 생각을 안합니까?》
정국은 뜻밖의 질문에 얼떠름해졌는지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어 그러는지 대답을 못하고 수옥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정국은 입을 열었다.
《허허, 이거 안됐소. 독신이 과장을 하니까 동무들이 불편한게 한두가지가 아닐거요. 집에 무슨 일이 있소?》
《예,우리 언니가 시집을 가겠답니다.》
수옥은 재빨리 과장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과는 달리 20여년간의 의사생활기간에 각이한 환자들과 나름대로 대상하는 법을 익힌 정국의 얼굴에서는 조그마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소? 거참 좋은 일이구만. 그러니 오늘이 결혼식하는 날이겠소?》
《그런건 아니구… 언니가 과장선생님 에 대해 묻더군요.》
수옥은 주머니에서 언니의 사진을 꺼내 정국이앞에 내밀었다. 정국은 사진앞에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마저도 하나의 사진으로 굳어진듯싶었다. 수옥은 순간에 마음이 홀가분해지는듯 한 느낌을 받았다. 정국은 뜻모를 웃음을 터뜨리더니 사진을 내려놓았다.
《허허, 동무 언니도 참, 하긴 어제저녁 룡남산통로로 언니에 대한 소개편집물이 나오더구만.》
유하게 하는 말이였지만 그것은 창끝처럼 수옥의 가슴을 찔렀다.
《언니를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언니를 모욕하는겁니다.》
정국의 얼굴이 그 순간 이지러졌다.
《모욕받은건 내가 아닐가?》
정국은 후- 하고 긴숨을 내그었다.
분한 심정을 그렇게 진정시키려는듯싶었다.
《난 4년전에 동무 언니한테서 거절을 당했소. 이건 오늘 내가 동무 언니를 거절할수 있는 리유가 될수도 있지 않을가? 동무 언니에겐 내가 아량이 푼푼한 사람으로 보이는것 같은데 사실 난 옹졸한 사람이요. 안됐소. 피차 감정을 건드리는 말은 그만두기요.》
《아니요.》하고 수옥은 완강히 도리머리를 저었다.
《전 해야겠습니다. 물론 거절하고말고는 과장선생님 의 자유지만 언니의 인격만은 지키고싶습니다. 과장선생님 은 우리 언니가 왜 사진을 돌려보냈댔는지 그 리유를 알고싶지 않습니까?》
《…》
묵묵히 앉아있던 정국은 안경을 벗었다.
그러더니 맵시나게 생긴 도수안경알을 안경수건으로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그것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인 수옥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했어야 할 이야기이지만 변명이 될가봐 못했습니다.우리 언니가 왜 그랬는지 리해하자면 어차피 언니의 지난날부터 들으셔야 할겁니다.》
수옥은 그때 책상우에 놓인 사진속에서 언니가 근심어린 눈길로 자기를 올려다보는듯 한 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딱히 원인을 알수 없는 불안을 안은채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사실우리 언니는 자기가 앞으로 기계연구사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우리 언니는 인민학교(당시)때부터 소년궁전 음악소조를 다녔습니다. 어머니가 교향악단 바이올린연주가였지요. 아버지 는 구역병원 의사였는데 언니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시군 하였습니다. 《국제콩클심사원을 한 백고산선생만큼 되지 못하겠으면 바이올린 타는건 재간쯤으로 배워둬라. 뭐니뭐니해두 우선 공부가 첫째야. 녀자는 공부를 더 이악하게 해야 한다. 남자가 미련한것은 비웃을 여지라도 있겠지만 녀자가 아둔한것은 정말 못 참겠다. 무식한 어머니는 무식한 자식을 만드니까.》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 의 말이 법이나 같았습니다. 일요일이나 명절날에도 아버지 는 우리 자매를 꼭 붙잡아놓고 공부를 시키군 했습니다.
그런아버지 의 의사에 따라 언니는 음악대학이 아니라 의학대학입학시험을 치게 되였습니다. 머리가 좋고 이악한 언니가 의학을 전공한다면 꼭 성공하리라는것이 아버지 의 견해였지요. 하지만 언니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팔에 주사기를 꽂아요? 수술할 땐 더 무섭겠지요? 그러다가 사람을 못살리면 어떻게 해요?》
언니는아버지 의 학문이 무서웠던겁니다.
그런데아버지 는 오히려 《바로 그런 사람이 의사가 돼야 한다. 그래야 의료사고란 말조차 없어질게 아니겠니.》하고 못박았답니다. 언니는 꾀를 썼습니다. 그래서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게 되였지요. 물론 일이 났습니다. 아버지 가 언니를 집에 들여놓지 않았던것입니다.
《비바람 맞지 못한 꽃은 구실을 못하는 법이다. 아버질 탓하지 말아.》
진눈까비가 내리던 어느날아버지 는 그 길로 여러곳에 전화를 한 다음 대문밖의 선자리에서 언니를 집에서 30리 떨어진 어느 연구소의 조수로 보냈습니다.
그날 밤아버지 와 어머니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나도 언니가 걱정되여 난생처음으로 꼬박 밤을 밝혔습니다.
언니의 사회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였습니다.
진눈까비 내리던 그날로부터 꼭 열달후 언니는 다시 대학추천을 받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청같이 기계대학 수험자격이 연구소로 날아들었습니다. 그 수험자격뒤에는 역시아버지 가 서있었습니다.
《기계는 생명체가 아니니 한결 나을거다.》
언닌 아예 절망에 빠져버렸습니다.
기계는커녕 왼나사와 오른나사도 제대로 못갈라보는 언니였지요.
얼굴을 싸쥔 언니에게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시험은 쳐보렴. 이번까지 포기했다가 영 대학추천을 받지 못하면 어떡하겠니.》
《흑, 그럼 그냥 조수를 하지요 뭐.》
《안돼, 그러자고 바이올린을 걷어치웠니? 넌 집안의 맏이야. 네 일이 잘돼야 수옥이 일도 잘된다.》
별수 없이 언니는 두번째 입학시험을 쳤습니다. 일이 잘됐다고 해야 할지 안됐다고 해야 할지 언니는 덜컥 붙었습니다. 남들은 입학통지서를 받은 날 너무 기뻐 잠 못 잔다지만우리 언니는 앞으로 이 일을 어쩌면 좋아 하는 근심때문에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입학후 언니는 풀이 죽어 다녔습니다.
공부도 마지못해 했고 일요일날엔 아예 늦잠을 자더군요. 그렇게 두어달 지났던 어느날 저녁 언니는 금방 퇴근하신아버지 앞에 시험지를 꺼내놓았습니다.
《오늘 중간시험을 쳤어요.선생님 이 부모들 수표를 받아오래요.》
아버지 는 어리둥절해졌습니다.
《대학이 무슨 소학교나 중학교라고 수표를 받아오라고 한단 말이냐?》
그러면서도아버지 는 시험지를 받았습니다.
시험지를 들여다보던아버지 의 손이 갑자기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험지엔 뜻밖에도 까만 중성필로 3점이라고 새겨져있었던것입니다. 아버지 는 그때에야 수표란 사실 구실에 불과하다는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3점짜리 시험지야말로 아버지 에 대한 언니의 고까움과 야속함 그자체였던것입니다.
언니는 난생처음아버지 앞에서 도전적인 태도를 취한것이였습니다.
푸들푸들 떨리는아버지 의 입에선 당장 노성이 터져나올것 같았습니다.
난 속이 조마조마해서아버지 와 언니를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꼭 무슨 일이 날것만 같았습니다. 바로 그때 문두드리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신것은 언니의 담임선생님 이였습니다.
…머리를 푹 숙이고 앉아있는 언니앞에는 3점이 새겨진 시험지가 놓여있었습니다.
선생님 은 말씀하셨습니다.
《솔직히 난 네가 이번 시험에서 3점까지 맞을줄은 몰랐다. 애착이란 전혀 없는 학문에 그정도로 성의를 보일수 있다니…》
그만에야 언니는 눈물을 쏟았습니다.아버지 에 대한 고까운 감정밑에 숨어있던 창피감과 수치감이 그제서야 설음으로 쏟아져나온것입니다.
《제 잘못입니다.》하고아버지 가 무거운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릴적부터 바이올린을 배워서 음악대학에 가겠다는걸 제가 못 가게 했지요.》
선생님 은 한참이나 울고있는 언니를 바라보다가 말씀하셨습니다.
《수정아, 생활은 복잡다단해서 모든것이 항상 만족하고 유리할순 없다. 나도 내가 기계공학자가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나의 희망은 문학이였으니까.》
선생님 은 잠시 말을 끊고 창밖을 내다보다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이왕 대학에 붙었으니 졸업할 때까진 공부를 이악하게 하라는 뻔한 소리를 하고싶지 않구나. 그만두겠으면 더 늦기전에 이제 당장 물러서는것도 괜찮아. 노력하기 싫으면 선택이라도 잘해라. 하지만 그런 사람의 앞날이란 잘돼야 이 시험지처럼 3점일테지.
내가 여직 살면서 보니 사람의 진가는 악조건속에서 드러나더구나. 어느 책을 보니 어두울 땐 하다못해 초불이라도 되라고 썼더라. 이 시험지는 3점짜리 인생을 살지 않도록 네가 건사해둬라.》
선생님 은 자리에서 일어서시였습니다.
나는 그때 어려서 (열두살이였음.)선생님 의 말씀이 하나도 리해되지 않았답니다.
다만 그날 밤아버지 가 혼자소리처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수정이가 담임선생님 을 정말 잘 만났어.》
그날은 언니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였습니다. 며칠후 집에 돌아온 언니가 담임선생님 이 쓸모있고 발전된 여러가지 기계들을 많이 만들어 위대한 수령님 께 기쁨을 드린 이름난 교수 박사이고 로력영웅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 온 식구가 놀랐습니다.
또 며칠후 언니는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엄만 아나?선생님 이 그러는데 세계와 자기 운명을 개조변혁하기 위한 사람의 창조성은 로동수단의 발전에서 뚜렷이 나타난대요. 콤퓨터도 처음엔 기계였다나. 참 어찌나 귀에 쏙 들어오던지… 한마디루 난 력사발전의 아주 중요한 전구에 서있거던.》
무슨 말인지 역시 알수 없었지만 나는 언니를 놀라운 눈길로 바라보았습니다.
언니는 더는 3점생이 아니였습니다. 그 다음학기부터 박사원까지 과정안 전기간을 언니는 최우등만 했답니다.
언니가 첫 연구과제를 성공했을 때 (그때가 박사원 3학년때였음.)우리 집에서는 소박한 가족연회가 마련되였고 언니는 참 오래간만에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따뜻한 깃을 찾아 새들은 가도
찬바람 부는 길을 처녀는 가네
…
《그만해라.》
감정이 무척 예민했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마당가로 달려나갔습니다. 그 노래에서 언니의 앞날을 어머니다운 직감으로 내다보았던것 같아요.
아버지 는 묵묵히 앉아있기만 하셨습니다.
채 못 그은 활을 들고 굳어진듯 서있던 언니의 그 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겠습니다.
언니는 그렇게 찬바람부는 길을 이악하게 걸어갔습니다.
나라가 아직은 시련의 흔적을 채 가시지 못했던 어느해 초봄에 있은 일입니다. 대학에서 밤늦도록 인체해부생리학에 몰두해있던 내가 비를 그어가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도 창가에서는 불빛이 흘러나오고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내가 나서자란 교외의 고향집이 아니라 나라에서 언니에게 배정해준 첫집인 시내의 두칸짜리 다층살림집에서 의학대학을 다녔습니다.)
홀로 자는 때가 많았던 나는 너무도 반가워 2층까지 막 달려올라갔습니다.
언니를 놀래울 심산에서 살그머니 방안에 들어서서 발볌발볌 다가가던 나는 그만 그 자리에 굳어졌습니다. 책상우에서 초불이 가물가물 타는데 그앞에서 언니가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있었던것입니다.
나는 생각을 고쳐먹고 조용히 다가가 언니의 두어깨를 꼭 그러쥐였습니다.
《언니야, 왜 그래?》
그러자 언니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였습니다.
《아, 어쩌면 그럴수 있을가. 글쎄 나더러 이제는 시집을… 시집을 가라는구나.》
초불이 바르르 떨렸습니다.
《응? 시집? 시집을 가면 좋지 뭘 그래?》
그러자 언니는 머리를 쳐들었는데 작고 동그스름하고 납죽해보이는 언니의 얼굴이 어찌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오른게 아니겠습니까.
《너도 그렇게 말하니? 그럼 난 어쩌라니.》
언니는 무릎우에 놓였던 한아름이나 되는 기계도면퉁구리들을 책상우에 힘없이 올려놓았습니다. 그 바람에 초불은 그만 꺼져버리고 방안엔 어둠이 깃들었습니다.
《그럼 이건 누가 완성하겠니? 네가? 아니면 앓고계시는선생님 이? 난 오늘 이걸 스무번째로 실패했단다.》
(그랬댔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뇌이였습니다.
언니의 몸부림이 나의 몸과 마음에 그대로 미쳐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부러 명랑한 어조로 말했지요.
《언니답지 않게 뭘 그래. 실패할수도 있지 뭐. 노력이 없는 사람에겐 실패도 없다고 언니가 노상 말했지? 영화를 보니 녀성과학자들이 한바탕 울고나면 다음번엔 성공하더구나.》
손더듬으로 성냥을 찾아쥔 나는 다시 초에 불을 달았습니다. 언니는 도리머리를 저었습니다.
《아니, 더는 못 견디겠어. 오후에 또 실패하구 너무 힘들어서 앓고계시는선생님 을 찾아갔댔어. 연구사일을 더 못하겠다구 투정을 했구나. 그런데 선생님 이 나약하고 구실 못한다고 꾸짖을 대신 날더러 미안하다는게 아니니. 이 수정이를 서른이 다되도록 너무 기계에만 붙잡아놓았다구. 그러면서 더 늦기 전에 시집을 가라는구나, 흐윽… 선생님 한테 욕을 먹고나면 이 고비를 넘길것 같아 찾아갔댔는데… 이제 난 어쩌면 좋니. 기계말고 도대체 내가 할줄 아는게 뭔가 말이야.》
언니의 괴로움과 몸부림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것입니다. 기계를 놓으면 언니는 사실상 그저 로처녀일뿐이였지요.
솔직히 인물도 뛰여나지 못하고 키도 작은데다가 집에서 쌀함박 한번 못 쥐게 하고 공부를 시켰거던요. 전혀 생면부지였던 기계를 알게 해주고 그것을 인생 그자체가 되도록 배워주고 이끌어준 스승의 너무도 뜻밖의 립장이 언니를 절망에 사로잡히게 한것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새벽 언니의 담임선생이였으며 공로있는 로교수였던 스승이 심장마비로 운명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가장 사랑하고 믿어마지않는 한 제자가 겪을 마음속고통이 준 충격과 또 불치의 병마와도 간고한 싸움을 벌리던 스승의 심장은 견디지 못했을겁니다. 스승은 알고있었습니다. 제자의 실패에 어느것이 제일 명약인가를.…
몇십번은 더했을 욕이나 타이름이 아니라 양보로써 언니 스스로가 이 길에서 물러서면 어떤 운명이 차례지는가를 깨우쳐주고싶었던것입니다. 그것은 머리흰 스승의 인생과 인간의 가치에 대한 마지막강의였습니다. 그 강의는 스승조차도 견디기 힘든 너무도 가혹한것이였습니다. 언니는 너무도 모질고 눈물겹고 억이 막혀 울었습니다. 스승의 묘소에서 언니는 눈물속에 맹세했습니다.
《선생님 , 이 수정이는 절대로 3점생이 되지 않겠습니다.》
그날 언니는 내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수정인 죽었다. 난 스승의 몫으로 살아야 해.》
…그때부터 언니에겐 명절날, 휴식날이 따로 없었습니다. 남들이 유원지로, 명승지로, 유희장으로 갈 때 언니는 진밤색의 작업복을 입고 현장으로 갔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남편이랑 자식들은 어떻게 하고 나옵니까?》
그러면 언니는 아직 미완성인 기계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여기에 나랑 함께 있지 않나요.》
무슨 일인들 없었겠습니까. 어느 공장에 자리잡고 연구사업을 하던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답니다. 퇴근무렵이 다 되였는데 연구조 부조장인 성철동지가 언니를 찾아왔습니다.
《최선생님 , 래일 오전에 시간을 좀 주십시오. 어머니가 앓는데 병원에 입원시켜야 할것 같습니다.》
언니는 내색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아요. 그렇지만 알지요?》
《압니다. 래일과제는 오후시간에 무조건 해내겠습니다.》
한 이십분쯤 지났을 때 이번에는 로가성을 가진 연구사가 슬슬 걸어오더니 언니앞에 사과 한알을 슬그머니 올려놓았습니다.
《나두 좀 주겠습니까?》
《뭐 말이예요?》
《시간이지 뭐겠습니까?》
《사과만큼 주겠어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래일 오후에 군대나갔던 동생이 제대되여 옵니다. 그런데 마중갈 사람이 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오후 한나절이면 됩니다.》
그것도 승인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연구조의 막냉이고 금순이, 은순이 쌍둥이아버지 인 순남동지는 입이 한발이나 나와서 두덜거렸습니다.
《다 그러면 난 어떡하란거야.》
그날 밤 언니는 퇴근을 못했습니다. 매 사람의 하루 연구과제란 그들의 능력을 최량화해서 계산된것이기때문에 그것을 한나절에 수행한다는것은 불가능하다는걸 언니는 알고있었던겁니다.
연구조장인 언니는 매 사람들의 연구과제에 대해 충분한 파악이 있었습니다. 두사람의 다음날 과제를 절반씩 미리 해주다나니 새날이 밝았습니다. 피곤했지만 언니의 마음은 즐거웠답니다. 세면을 하려고 공장정양소로 향하던 언니는 공장이 별스레 조용한것이 이상했습니다. 그러다가 관리청사현관벽에 대문짝만하게 써붙인 축하표어를 보는 순간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습니다.
《국제부녀절을 맞는 공장의 녀성로동자동무들을 축하합니다! 혁명의 한쪽수레바퀴를 믿음직하게 떠밀며 가정의 꽃, 공장의 꽃, 나라의 꽃으로 일터와 가정에 기쁨과 향기를 더해주는 그대들! 그대들이 없다면 생활의 한자리, 투쟁의 한자리, 혁명의 한자리가 비여있으리! 공무직장의아버지 , 남편, 오빠, 동생 그리고 아들들 일동.》
그날은 알고보니 바로 3월 8일이였던것입니다. 그제서야 언니는 깨달았습니다.
연구사들이 내세운 가정사정이란… 사실 거짓말이였던겁니다.
남편들이 안해들을 위하여 무언가 해줄수 있는 아니, 무조건 해주어야 하는 날인 년중 한번밖에 없는 국제부녀절! 이른새벽 안해대신 밥도 해주고 극장이나 공원, 유원지로 가족들놀이도 가고싶었을겁니다. 다정히 팔을 끼고 백화점에 가선 즐거운 다툼속에 화장품이랑 그릇가지들을 고르고싶었을것입니다.
1년내내 연구현장에서 살다싶이 하는 그들은 더더욱 이날 단 한나절만이라도 안해들에게 무엇인가 해주고싶었던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니에게 내놓고 그렇게 말할수 없었습니다.우리 언니에겐 그렇게 축하해줄 남편이… 없었으니까요.
언니도 녀자였습니다. 하지만 울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땀을 흘렸습니다. 그 땀속에 바로 녀성으로서 언니의 눈물이 있었던겁니다.
…현장에서위대한 장군님 과 경애하는 원수님 을 한날한시에 만나뵙고 자기가 만들어낸 새 기계들의 동작모습을 보여드린 그날 언니는 웃을대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이야말로 그 어떤 값진 재부나 명예로도 대신 못할 언니의 고결한 넋이라고 전 지금도 생각합니다. 한해후 몇종의 경공업기계들을 더 만들었을 때 언니는 또다시 영광의 시각을 맞이했습니다. 정말 기특한 과학자라고 하시며 아버지 장군님 께서는 언니를 몸가까이에 부르시여 사랑의 기념사진을 찍어주시였던것입니다.
연구조 4명전원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하도록 해주시고 언니와 성철동지에게는 공훈과학자의 값높은 칭호까지 안겨주시였습니다.
한생의 소원이 이루어졌던 그 영광의 날 언니는 내게 말했습니다.
《밤늦어 연구소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난 이런 생각을 하군 했단다. 만일 내가 꿈처럼아버지 장군님 을 문득 만나뵈오면 뭐라고 말씀드릴가 하구 말이다. 어떤 때는 마치 모든 대답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가 하면 어떤 때는 안타까울 정도로 떠오르지 않아 속을 태웠지. 그러다보면 어느새 집이더구나. 그러면 내가 도대체 뭘했다고 이런 렴치없는 생각을 하는걸가 하는 생각에 자신이 스스로도 못나보였다. 그래서 집문앞에서 다시 현장으로 돌아선적이 이루 셀수 없었지. 그런데 글쎄 내스스로서도 꿈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소원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니.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두번이나 말이다. 난 정말, 정말 행복한 녀자야.》
언니의 그 말은 결코 영화나 책에서 옮긴 말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우리 언니의 심장깊은 곳에서 울려나온 진심의 목소리였습니다.
나는 비록 친동생이였지만 언니가 얼마나 돋보이는지 몰랐답니다. 언니의 그 고결한 행복관에 가정적행복이 겹치면 정말로 부러운것이 없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장선생님 에 대한 생각은 그때 떠올랐던것입니다.
나는 언니에게 말했습니다.선생님 이 군사복무를 마친 후 공부에 열중하던 나머지 혼기를 놓쳤다는거랑, 심장수술계통에선 손꼽히는 권위자라는 말이랑…
그때 언니는선생님 의 사진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높이 사주니 과장선생님 이 정말 고맙구나. 하지만 너도 나를 잘 알지 않니. 생활에선 령인 내가 그런 훌륭한 사람의 짝이 되겠니? 되려 부담이나 될게다. 이때껏 독신생활에 습관되였는데 환경이 갑자기 변하면 연구사업에도 지장이 갈거구. 난 자신없구나.》
언니말도 옳았지만 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언니가 왜 짝이 기운다는거야. 생활문제도 같지 뭐. 다 알구 시집가는 녀자가 어디에 있대? 가서 배우는거지. 한번 만나봐.》
언니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만나면 난 자신을 걷잡지 못할것 같애. 난 그렇게 살면 안돼. 지금까지의 모든것은 다선생님 의 몫이였다. 이제는 이 최수정의 몫이 있어야 하지 않겠니.》라구요…
타자가 빠르고 정확한 그는 과의 병력서를 거의 혼자서 기입하군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엔 마음이 편안치 않아 그런지 정신을 집중할수가 없었다. 빈번히 오자가 생기는가 하면 문자변환을 하지 못하고 건을 눌러 병명란에 라틴어대신 조선어자모음이 무질서하게 생겨나기도 했다. 신경질적으로 거꾸로지우기건을 두드려대던 수옥은 건반을 밀어버렸다.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아침에 그는 언니의 부탁대로 한정국을 만나기 위해 과장실문을 두드렸다. 마침 그는 방에 있었다. 량수책상앞에 앉아 무엇인가 쓰고있던 정국이 머리를 쳐들었다.
《무슨 일이요? 퇴직문제때문이면 출장간 당
그런 일이 있었다. 사실 의사란 가정부인들에게 힘든 직업중의 하나이다. 왕진, 회진, 집중치료, 환자호송 … 남아돌아가는 시간이 없었다. 소학교와 유치원을 다니는 향순이와 대철이의 뒤시중도 할래 수산성에서 근무하는 남편의 뒤바라지를 잘하재도 그래 시간이 모자라서 늘 전전긍긍하던 그는 며칠전에 과장에게 그런 제기를 했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
수옥은 말끝을 흐렸다.
정국은 의아한 눈길로 수옥을 건너다보았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한담.)
면구스럽기 그지없는 몇초가 흘러가자 수옥은 머리속에 순서없이 떠올랐던 자기같지 않은 애매하고 아리숭한 말마디들을 모두 밀어버리고 직방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한다구 욕하진 마십시오. 과장
정국은 뜻밖의 질문에 얼떠름해졌는지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어 그러는지 대답을 못하고 수옥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정국은 입을 열었다.
《허허, 이거 안됐소. 독신이 과장을 하니까 동무들이 불편한게 한두가지가 아닐거요. 집에 무슨 일이 있소?》
《예,
수옥은 재빨리 과장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과는 달리 20여년간의 의사생활기간에 각이한 환자들과 나름대로 대상하는 법을 익힌 정국의 얼굴에서는 조그마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소? 거참 좋은 일이구만. 그러니 오늘이 결혼식하는 날이겠소?》
《그런건 아니구… 언니가 과장
수옥은 주머니에서 언니의 사진을 꺼내 정국이앞에 내밀었다. 정국은 사진앞에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마저도 하나의 사진으로 굳어진듯싶었다. 수옥은 순간에 마음이 홀가분해지는듯 한 느낌을 받았다. 정국은 뜻모를 웃음을 터뜨리더니 사진을 내려놓았다.
《허허, 동무 언니도 참, 하긴 어제저녁 룡남산통로로 언니에 대한 소개편집물이 나오더구만.》
유하게 하는 말이였지만 그것은 창끝처럼 수옥의 가슴을 찔렀다.
《언니를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언니를 모욕하는겁니다.》
정국의 얼굴이 그 순간 이지러졌다.
《모욕받은건 내가 아닐가?》
정국은 후- 하고 긴숨을 내그었다.
분한 심정을 그렇게 진정시키려는듯싶었다.
《난 4년전에 동무 언니한테서 거절을 당했소. 이건 오늘 내가 동무 언니를 거절할수 있는 리유가 될수도 있지 않을가? 동무 언니에겐 내가 아량이 푼푼한 사람으로 보이는것 같은데 사실 난 옹졸한 사람이요. 안됐소. 피차 감정을 건드리는 말은 그만두기요.》
《아니요.》하고 수옥은 완강히 도리머리를 저었다.
《전 해야겠습니다. 물론 거절하고말고는 과장
《…》
묵묵히 앉아있던 정국은 안경을 벗었다.
그러더니 맵시나게 생긴 도수안경알을 안경수건으로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그것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인 수옥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했어야 할 이야기이지만 변명이 될가봐 못했습니다.
수옥은 그때 책상우에 놓인 사진속에서 언니가 근심어린 눈길로 자기를 올려다보는듯 한 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딱히 원인을 알수 없는 불안을 안은채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사실
그런
《어떻게 사람의 팔에 주사기를 꽂아요? 수술할 땐 더 무섭겠지요? 그러다가 사람을 못살리면 어떻게 해요?》
언니는
그런데
《비바람 맞지 못한 꽃은 구실을 못하는 법이다. 아버질 탓하지 말아.》
진눈까비가 내리던 어느날
그날 밤
언니의 사회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였습니다.
진눈까비 내리던 그날로부터 꼭 열달후 언니는 다시 대학추천을 받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청같이 기계대학 수험자격이 연구소로 날아들었습니다. 그 수험자격뒤에는 역시
《기계는 생명체가 아니니 한결 나을거다.》
언닌 아예 절망에 빠져버렸습니다.
기계는커녕 왼나사와 오른나사도 제대로 못갈라보는 언니였지요.
얼굴을 싸쥔 언니에게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시험은 쳐보렴. 이번까지 포기했다가 영 대학추천을 받지 못하면 어떡하겠니.》
《흑, 그럼 그냥 조수를 하지요 뭐.》
《안돼, 그러자고 바이올린을 걷어치웠니? 넌 집안의 맏이야. 네 일이 잘돼야 수옥이 일도 잘된다.》
별수 없이 언니는 두번째 입학시험을 쳤습니다. 일이 잘됐다고 해야 할지 안됐다고 해야 할지 언니는 덜컥 붙었습니다. 남들은 입학통지서를 받은 날 너무 기뻐 잠 못 잔다지만
입학후 언니는 풀이 죽어 다녔습니다.
공부도 마지못해 했고 일요일날엔 아예 늦잠을 자더군요. 그렇게 두어달 지났던 어느날 저녁 언니는 금방 퇴근하신
《오늘 중간시험을 쳤어요.
《대학이 무슨 소학교나 중학교라고 수표를 받아오라고 한단 말이냐?》
그러면서도
시험지를 들여다보던
언니는 난생처음
푸들푸들 떨리는
난 속이 조마조마해서
…머리를 푹 숙이고 앉아있는 언니앞에는 3점이 새겨진 시험지가 놓여있었습니다.
《솔직히 난 네가 이번 시험에서 3점까지 맞을줄은 몰랐다. 애착이란 전혀 없는 학문에 그정도로 성의를 보일수 있다니…》
그만에야 언니는 눈물을 쏟았습니다.
《제 잘못입니다.》하고
《어릴적부터 바이올린을 배워서 음악대학에 가겠다는걸 제가 못 가게 했지요.》
《수정아, 생활은 복잡다단해서 모든것이 항상 만족하고 유리할순 없다. 나도 내가 기계공학자가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나의 희망은 문학이였으니까.》
《너에게 이왕 대학에 붙었으니 졸업할 때까진 공부를 이악하게 하라는 뻔한 소리를 하고싶지 않구나. 그만두겠으면 더 늦기전에 이제 당장 물러서는것도 괜찮아. 노력하기 싫으면 선택이라도 잘해라. 하지만 그런 사람의 앞날이란 잘돼야 이 시험지처럼 3점일테지.
내가 여직 살면서 보니 사람의 진가는 악조건속에서 드러나더구나. 어느 책을 보니 어두울 땐 하다못해 초불이라도 되라고 썼더라. 이 시험지는 3점짜리 인생을 살지 않도록 네가 건사해둬라.》
나는 그때 어려서 (열두살이였음.)
다만 그날 밤
《수정이가 담임
그날은 언니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였습니다. 며칠후 집에 돌아온 언니가 담임
또 며칠후 언니는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엄만 아나?
무슨 말인지 역시 알수 없었지만 나는 언니를 놀라운 눈길로 바라보았습니다.
언니는 더는 3점생이 아니였습니다. 그 다음학기부터 박사원까지 과정안 전기간을 언니는 최우등만 했답니다.
언니가 첫 연구과제를 성공했을 때 (그때가 박사원 3학년때였음.)
따뜻한 깃을 찾아 새들은 가도
찬바람 부는 길을 처녀는 가네
…
《그만해라.》
감정이 무척 예민했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마당가로 달려나갔습니다. 그 노래에서 언니의 앞날을 어머니다운 직감으로 내다보았던것 같아요.
채 못 그은 활을 들고 굳어진듯 서있던 언니의 그 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겠습니다.
언니는 그렇게 찬바람부는 길을 이악하게 걸어갔습니다.
나라가 아직은 시련의 흔적을 채 가시지 못했던 어느해 초봄에 있은 일입니다. 대학에서 밤늦도록 인체해부생리학에 몰두해있던 내가 비를 그어가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도 창가에서는 불빛이 흘러나오고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내가 나서자란 교외의 고향집이 아니라 나라에서 언니에게 배정해준 첫집인 시내의 두칸짜리 다층살림집에서 의학대학을 다녔습니다.)
홀로 자는 때가 많았던 나는 너무도 반가워 2층까지 막 달려올라갔습니다.
언니를 놀래울 심산에서 살그머니 방안에 들어서서 발볌발볌 다가가던 나는 그만 그 자리에 굳어졌습니다. 책상우에서 초불이 가물가물 타는데 그앞에서 언니가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있었던것입니다.
나는 생각을 고쳐먹고 조용히 다가가 언니의 두어깨를 꼭 그러쥐였습니다.
《언니야, 왜 그래?》
그러자 언니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였습니다.
《아, 어쩌면 그럴수 있을가. 글쎄 나더러 이제는 시집을… 시집을 가라는구나.》
초불이 바르르 떨렸습니다.
《응? 시집? 시집을 가면 좋지 뭘 그래?》
그러자 언니는 머리를 쳐들었는데 작고 동그스름하고 납죽해보이는 언니의 얼굴이 어찌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오른게 아니겠습니까.
《너도 그렇게 말하니? 그럼 난 어쩌라니.》
언니는 무릎우에 놓였던 한아름이나 되는 기계도면퉁구리들을 책상우에 힘없이 올려놓았습니다. 그 바람에 초불은 그만 꺼져버리고 방안엔 어둠이 깃들었습니다.
《그럼 이건 누가 완성하겠니? 네가? 아니면 앓고계시는
(그랬댔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뇌이였습니다.
언니의 몸부림이 나의 몸과 마음에 그대로 미쳐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부러 명랑한 어조로 말했지요.
《언니답지 않게 뭘 그래. 실패할수도 있지 뭐. 노력이 없는 사람에겐 실패도 없다고 언니가 노상 말했지? 영화를 보니 녀성과학자들이 한바탕 울고나면 다음번엔 성공하더구나.》
손더듬으로 성냥을 찾아쥔 나는 다시 초에 불을 달았습니다. 언니는 도리머리를 저었습니다.
《아니, 더는 못 견디겠어. 오후에 또 실패하구 너무 힘들어서 앓고계시는
언니의 괴로움과 몸부림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것입니다. 기계를 놓으면 언니는 사실상 그저 로처녀일뿐이였지요.
솔직히 인물도 뛰여나지 못하고 키도 작은데다가 집에서 쌀함박 한번 못 쥐게 하고 공부를 시켰거던요. 전혀 생면부지였던 기계를 알게 해주고 그것을 인생 그자체가 되도록 배워주고 이끌어준 스승의 너무도 뜻밖의 립장이 언니를 절망에 사로잡히게 한것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새벽 언니의 담임선생이였으며 공로있는 로교수였던 스승이 심장마비로 운명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가장 사랑하고 믿어마지않는 한 제자가 겪을 마음속고통이 준 충격과 또 불치의 병마와도 간고한 싸움을 벌리던 스승의 심장은 견디지 못했을겁니다. 스승은 알고있었습니다. 제자의 실패에 어느것이 제일 명약인가를.…
몇십번은 더했을 욕이나 타이름이 아니라 양보로써 언니 스스로가 이 길에서 물러서면 어떤 운명이 차례지는가를 깨우쳐주고싶었던것입니다. 그것은 머리흰 스승의 인생과 인간의 가치에 대한 마지막강의였습니다. 그 강의는 스승조차도 견디기 힘든 너무도 가혹한것이였습니다. 언니는 너무도 모질고 눈물겹고 억이 막혀 울었습니다. 스승의 묘소에서 언니는 눈물속에 맹세했습니다.
《
그날 언니는 내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수정인 죽었다. 난 스승의 몫으로 살아야 해.》
…그때부터 언니에겐 명절날, 휴식날이 따로 없었습니다. 남들이 유원지로, 명승지로, 유희장으로 갈 때 언니는 진밤색의 작업복을 입고 현장으로 갔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남편이랑 자식들은 어떻게 하고 나옵니까?》
그러면 언니는 아직 미완성인 기계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여기에 나랑 함께 있지 않나요.》
무슨 일인들 없었겠습니까. 어느 공장에 자리잡고 연구사업을 하던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답니다. 퇴근무렵이 다 되였는데 연구조 부조장인 성철동지가 언니를 찾아왔습니다.
《최
언니는 내색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아요. 그렇지만 알지요?》
《압니다. 래일과제는 오후시간에 무조건 해내겠습니다.》
한 이십분쯤 지났을 때 이번에는 로가성을 가진 연구사가 슬슬 걸어오더니 언니앞에 사과 한알을 슬그머니 올려놓았습니다.
《나두 좀 주겠습니까?》
《뭐 말이예요?》
《시간이지 뭐겠습니까?》
《사과만큼 주겠어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래일 오후에 군대나갔던 동생이 제대되여 옵니다. 그런데 마중갈 사람이 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오후 한나절이면 됩니다.》
그것도 승인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연구조의 막냉이고 금순이, 은순이 쌍둥이
《다 그러면 난 어떡하란거야.》
그날 밤 언니는 퇴근을 못했습니다. 매 사람의 하루 연구과제란 그들의 능력을 최량화해서 계산된것이기때문에 그것을 한나절에 수행한다는것은 불가능하다는걸 언니는 알고있었던겁니다.
연구조장인 언니는 매 사람들의 연구과제에 대해 충분한 파악이 있었습니다. 두사람의 다음날 과제를 절반씩 미리 해주다나니 새날이 밝았습니다. 피곤했지만 언니의 마음은 즐거웠답니다. 세면을 하려고 공장정양소로 향하던 언니는 공장이 별스레 조용한것이 이상했습니다. 그러다가 관리청사현관벽에 대문짝만하게 써붙인 축하표어를 보는 순간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습니다.
《국제부녀절을 맞는 공장의 녀성로동자동무들을 축하합니다! 혁명의 한쪽수레바퀴를 믿음직하게 떠밀며 가정의 꽃, 공장의 꽃, 나라의 꽃으로 일터와 가정에 기쁨과 향기를 더해주는 그대들! 그대들이 없다면 생활의 한자리, 투쟁의 한자리, 혁명의 한자리가 비여있으리! 공무직장의
그날은 알고보니 바로 3월 8일이였던것입니다. 그제서야 언니는 깨달았습니다.
연구사들이 내세운 가정사정이란… 사실 거짓말이였던겁니다.
남편들이 안해들을 위하여 무언가 해줄수 있는 아니, 무조건 해주어야 하는 날인 년중 한번밖에 없는 국제부녀절! 이른새벽 안해대신 밥도 해주고 극장이나 공원, 유원지로 가족들놀이도 가고싶었을겁니다. 다정히 팔을 끼고 백화점에 가선 즐거운 다툼속에 화장품이랑 그릇가지들을 고르고싶었을것입니다.
1년내내 연구현장에서 살다싶이 하는 그들은 더더욱 이날 단 한나절만이라도 안해들에게 무엇인가 해주고싶었던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니에게 내놓고 그렇게 말할수 없었습니다.
언니도 녀자였습니다. 하지만 울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땀을 흘렸습니다. 그 땀속에 바로 녀성으로서 언니의 눈물이 있었던겁니다.
…현장에서
연구조 4명전원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하도록 해주시고 언니와 성철동지에게는 공훈과학자의 값높은 칭호까지 안겨주시였습니다.
한생의 소원이 이루어졌던 그 영광의 날 언니는 내게 말했습니다.
《밤늦어 연구소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난 이런 생각을 하군 했단다. 만일 내가 꿈처럼
언니의 그 말은 결코 영화나 책에서 옮긴 말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나는 비록 친동생이였지만 언니가 얼마나 돋보이는지 몰랐답니다. 언니의 그 고결한 행복관에 가정적행복이 겹치면 정말로 부러운것이 없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장
나는 언니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언니는
《나를 높이 사주니 과장
언니말도 옳았지만 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언니가 왜 짝이 기운다는거야. 생활문제도 같지 뭐. 다 알구 시집가는 녀자가 어디에 있대? 가서 배우는거지. 한번 만나봐.》
언니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만나면 난 자신을 걷잡지 못할것 같애. 난 그렇게 살면 안돼. 지금까지의 모든것은 다
*
수옥은 가슴이 미여져와 여기서 말을 끊었다. 그는 이렇게 자기의 이야기를 끝내고싶었다.
《언니는 결코선생님 을 모욕한것이 아닙니다. 그건 누구의 인격에 대한 어떤 평가가 아니였으며 교만은 더욱 아니였습니다.
자신의 미숙함에 대한 인정이였고 또 하나의 헌신이기도 하였던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때 언니가선생님 에게 사진을 돌려보낸 리유입니다.》
그러나 수옥은 자기가 시작한 이야기를 끝낼수 없다는것을 그 순간 알아차렸다. 자기가 말했듯이 언니의 지난날은 사실상 훌륭했다.
그러나 오늘은…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자기가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것자체가 벌써 정국에겐 그 어떤 변명으로 들리지 않으리란 말인가.
자기의 이야기는 언니의 지난날에 대한 감동적인 설명인 동시에 오늘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으로도 되는것이다. 수옥은 정국에게 언니에 대해 이야기한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국을 찾아온것자체가 후회되였다.
이러한 결과를 응당 예상하고 언니에게 왜 시집을 갈 결심을 했는지 리유를 물었어야 했다. 수옥은 다음말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수옥을 측은한 눈길로 여겨보던 정국은 천천히 책상서랍을 열었다. 자기앞에 반듯이 놓여있는 수정의 사진을 집어들어 서랍안에 넣은 그는 한참 그안을 뒤적이더니 다른 사진을 꺼냈다. 그다음엔 그것을 수옥이에게 내밀었다.
《받소. 내 사진이요.》
《예?!》
《한달전에 찍은거요. 언니를 만나보겠소.》
《!》 수옥은 갑자기 코언저리가 시큰해오는 바람에 고개를 틀었다.
그는 끝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하지만…》하고 정국은 다시 입을 열었다. 착잡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흘렀다.
그는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만나본다고 해서 일이 다 성사되는건 아니지.》
그 역시 언니의 지나간 나날들에 대해서는 이미 공감했던것이다.
하지만 훌륭하게 산 한 녀성연구사가 어째서 체면이 깎이는줄을 알면서 이때껏 무시해오던 가정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는지 의혹이 갈마들었으리라. 수옥이 보건대도 사실상 시집을 가겠다는 언니의 결심은 어찌보면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전면부정이나 같은것이였다.
혹시 언니가 과학자로서의 자기의 사명에 이제는 《성공》이란 화려한 단어로 종지부를 찍은것은 아닌지… 그러나 성공이란 남이 인정해야 빛나는것이지 제스스로가 인정하면 벌써 천해지는 법이다.
…수옥은 다시 건반을 끄당겼다.
일단 흘러간 생활은 잘못 쓴 자모처럼 거꾸로 지울수 없는것이다.
그 누구의 생활이 옳든그르든간에 시간은 오직 앞으로만 변함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그 생활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행복하거나 혹은 불행해질 그의 운명이 하게 될것이다.
그리고 그 운명에 대해 알고있는 모든 사람들이 할것이다. 수옥은 한숨을 내그었다.
이제는 언니의 그 결심이 사회와 집단, 혈육과 동지들을 위한 가장 옳은 선택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수옥은 생각하는것이였다.
(호, 이 결말이 제발 아름답게 끝났으면 좋으련만…)
《언니는 결코
자신의 미숙함에 대한 인정이였고 또 하나의 헌신이기도 하였던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때 언니가
그러나 수옥은 자기가 시작한 이야기를 끝낼수 없다는것을 그 순간 알아차렸다. 자기가 말했듯이 언니의 지난날은 사실상 훌륭했다.
그러나 오늘은…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자기가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것자체가 벌써 정국에겐 그 어떤 변명으로 들리지 않으리란 말인가.
자기의 이야기는 언니의 지난날에 대한 감동적인 설명인 동시에 오늘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으로도 되는것이다. 수옥은 정국에게 언니에 대해 이야기한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국을 찾아온것자체가 후회되였다.
이러한 결과를 응당 예상하고 언니에게 왜 시집을 갈 결심을 했는지 리유를 물었어야 했다. 수옥은 다음말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수옥을 측은한 눈길로 여겨보던 정국은 천천히 책상서랍을 열었다. 자기앞에 반듯이 놓여있는 수정의 사진을 집어들어 서랍안에 넣은 그는 한참 그안을 뒤적이더니 다른 사진을 꺼냈다. 그다음엔 그것을 수옥이에게 내밀었다.
《받소. 내 사진이요.》
《예?!》
《한달전에 찍은거요. 언니를 만나보겠소.》
《!》 수옥은 갑자기 코언저리가 시큰해오는 바람에 고개를 틀었다.
그는 끝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하지만…》하고 정국은 다시 입을 열었다. 착잡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흘렀다.
그는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만나본다고 해서 일이 다 성사되는건 아니지.》
그 역시 언니의 지나간 나날들에 대해서는 이미 공감했던것이다.
하지만 훌륭하게 산 한 녀성연구사가 어째서 체면이 깎이는줄을 알면서 이때껏 무시해오던 가정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는지 의혹이 갈마들었으리라. 수옥이 보건대도 사실상 시집을 가겠다는 언니의 결심은 어찌보면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전면부정이나 같은것이였다.
혹시 언니가 과학자로서의 자기의 사명에 이제는 《성공》이란 화려한 단어로 종지부를 찍은것은 아닌지… 그러나 성공이란 남이 인정해야 빛나는것이지 제스스로가 인정하면 벌써 천해지는 법이다.
…수옥은 다시 건반을 끄당겼다.
일단 흘러간 생활은 잘못 쓴 자모처럼 거꾸로 지울수 없는것이다.
그 누구의 생활이 옳든그르든간에 시간은 오직 앞으로만 변함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그 생활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행복하거나 혹은 불행해질 그의 운명이 하게 될것이다.
그리고 그 운명에 대해 알고있는 모든 사람들이 할것이다. 수옥은 한숨을 내그었다.
이제는 언니의 그 결심이 사회와 집단, 혈육과 동지들을 위한 가장 옳은 선택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수옥은 생각하는것이였다.
(호, 이 결말이 제발 아름답게 끝났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