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와 조선 - 력사적사실
조선강점의 서막을 연 《운양》호사건
  일본의 과거 조선침략사는 인류력사에 전무후무한 날강도적인 행위들로 일관되여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1875년의 《운양》호사건도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조선에 대한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일본침략자들은 1870년대 중엽에 이르러 로골적인 무장도발을 빈번히 감행하였습니다.
  일본반동정부는 1875년 4월(양력 5월)부터 《운양》호를 비롯한 일본군함들을 조선령해에 들이밀어 정탐과 무력시위를 감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조선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는 저들의 목적을 실현할수 없었던 일본침략자들은 이해 8월(양력 9월) 또다시 침략선 《운양》호를 조선연해에 침입시켰습니다.


 조선연해에 침입한 《운양》호

  일본침략자들은 항로를 측량한다고 하면서 조선서해의 강화도근처에 불법침입하여 먹는물을 찾는다는 구실밑에 8월 21일(양력 9월 20일) 초지진포대를 점령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당시 강화도는 조선봉건국가의 수도인 한성(오늘의 서울)의 주요관문이였으며 초지진포대는 이 관문의 군사요충지였습니다. 때문에 조선봉건정부의 허락이 없이는 누구나 함부로 들어올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침략에 환장한 일본침략자들은 조선봉건정부의 아무러한 허락도 없이 침략군을 초지진포대 700m앞까지 접근시켰습니다.
  초지진의 수비병들은 아무런 통고도 없이 침범하는 침략자들에게 경고사격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응당한 자위적조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침략자들은 때를 만난듯이 저들의 국기와 군함기를 내건 다음 초지진포대를 향하여 포사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수비병들은 더욱 맹렬한 포사격을 들이대여 침략자들의 공세를 꺾어버렸습니다.
  초지진전투에서 패한 일본침략자들은 방어력이 약한 정산도와 영종도에 침입하여 포대를 파괴하고 무고한 인민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습니다.
  일본침략자들은 인민들의 재산을 닥치는대로 파괴략탈하였으며 나중에는 불을 질러 섬을 페허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력사에 기록된 《운양》호사건의 전말입니다.
  《운양》호사건은 철두철미 일본침략자들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감행된 침략행위로서 일본침략자들은 이에 대해 응당 조선봉건정부에 사죄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침략자들은 《군함의 급수방해》니, 《일본국기모욕》이니 하고 트집을 걸면서 《운양》호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조선봉건정부를 강박하였으며 1876년 2월 3일(양력 2월 27일) 《조일수호조규》를 강압체결하였습니다. 조선의 강화도에서 체결되였다고 하여 《강화도조약》이라고도 합니다.
  일본침략자들은 《강화도조약》에 조선의 항구들을 일본상인들의 《자유무역》을 위하여 개방하여야 한다는것을 규제하여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지배를 실현할수 있는 기본조건을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치외법권의 조항을 규정함으로써 조선의 주권행사를 제한하고 법에 구애됨이 없이 제 마음대로 침략과 략탈 그리고 온갖 만행을 다 저지를수 있는 법적담보를 마련해놓았습니다.
  뿐만아니라 《조약》에 조선연해에 대한 일본의 측량 및 지도작성의 자유를 보장할데 대한 조항을 박아넣음으로써 일본군국주의의 정치경제적침투뿐아니라 군사적침략의 길도 열어놓았습니다.
  《강화도조약》조작이후 일본의 조선침략은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섰으며 우리 나라에 대한 군사적강점과 병탄에로 이어지게 되였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교원 전경송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비린 죄악의 력사를 부정하고 외곡하는것이 일본지배층의 체질화된 악습입니다. 일본지배층은 <운양>호사건의 침략성을 보여주는 설명을 모두 없애버린 력사교과서를 가지고 새세대들을 교육하고있습니다.
  일본이 그러한 행위를 한다고 하여 그들의 침략성과 악랄성이 가리워지는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민은 일본의 과거침략행위를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며 천백배로 결산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