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화 - 예술, 체육
작곡가 김원균
  김일성훈장수훈자이며 김일성계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력영웅, 인민예술가로 값높은 생을 누린 작곡가 김원균선생은 우리 나라 음악명인들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통치시기에 소작살이를 하던 빈농의 가정에서 태여났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음악과 미술을 무척 좋아했지만 가난한 탓에 배울수 없었고 막벌이군으로 갖은 수모와 천대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나라가 해방된 소식도 고된 로동을 강요당하던 병기소에서 알게 되였습니다.
  아들 김경민은 말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너무 기뻐 거리에 떨쳐나와 <김일성장군 만세!>, <조국해방 만세!>를 목청껏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김원균선생은 그날 그 격정을 그대로 밤새껏  《조선행진곡》의 작사작곡에 터쳤으며 마을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배워주었습니다.
  해방된 다음날인 주체34(1945)년 8월 16일에 창작되여 사람들속에서 널리 애창된 이 노래는 김원균선생의 처녀작인 동시에 새 조선의 첫 노래이기도 하였습니다.
  해방후 선생은 희망대로 미술가가 되였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조국산천을 화폭에 담을수록 그는 20성상 항일혁명투쟁을 승리에로 이끄시여 조국을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에 대한 노래를 짓고싶은 충동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시인 리찬선생이 쓴 《김일성장군의 노래》의 가사를 보게 되였습니다. 작곡가도 아니고 전문음악교육을 받은적도 없었지만 그는 즉시 노래를 작곡할 결심을 다졌습니다.



  하여 주체35(1946)년 6월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세상에 나오게 되였습니다.
  전인민적사상감정을 담은 이 송가는 삽시에 온 나라에 전파되였고 선생은 이 노래와 함께 작곡가로 소문이 나게 되였습니다. 이때부터 김원균선생은 전문작곡가로 인생전환을 하게 되였습니다.



  주체36(1947)년 김원균선생은 또 하나의 명곡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인 《애국가》입니다.
  《애국가》는 수십년간 우리 공화국의 존엄과 영예의 상징으로 만방에 울려퍼졌습니다.
  김일성계관인 피바다가극단 실장 인민예술가 채명석은 말합니다.
  《김원균선생은 <애국가>를 창작한 후 많은 작품들을 내놓았는데 작품들을 보면 대체로 기백있고 열정적이며 호소성이 강한것이 특징입니다.》
  위대한 수령님을 높이 모신 긍지와 전진하는 인민들의 기상이 반영된 그의 작품들은 인민들의 애국심을 더욱 북돋아주며 널리 보급되였습니다.
  선생은 작곡가로서뿐아니라 당시의 평양음악무용대학 학장,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국제음악리사회 명예위원 등으로 사업하였습니다.



  나라의 음악예술인재들을 양성하는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에는 김원균선생의 반신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