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들을 감상해보십시오 - 서고
단편소설 《3년, 30년》(11)
2024년 창작

5

  어릴적의 기억력은 사진기 한가지라고들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많은 세월이 흐른뒤에도 유치원때와 소학교때 자기를 배워준 선생님을 생생히 기억한다. 내 경우에는 이름까지도 잊지 않고있다.
  하지만 역시 기억에 불과할뿐 성장한 후에 유치원은 그만두고라도 소학교시절 선생님을 찾아뵙는 제자가 과연 몇이나 될것인가.
  나도 그러지 못했거니와 수년간 교단에 섰던 어머니에게도 찾아오는 제자가 별로 없다.
  왜 그런가? 어머니말고도 더 많은것, 더 큰것을 가르쳐준 잊지 못할 스승들이 있기때문일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리고 높은 교육을 받을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한때 가갸표도 제대로 못외우고 더덜기법도 잘 몰라 선생님의 애를 박박 태운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것을 점차 잊게 된다. 하여 어머니배속에서부터 알고있은듯이 여겨질 때도 있는 그런 초보적인 지식을 상대성원리만큼이나 품들여 가르쳐준 소학교선생님들은 어린시절의 추억속에 그 모색만 댕그라니 남겨두고 아득히 멀어져간다.
  내 보건대는 《스승》이란 부름도 중학교나 대학의 선생님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듯 싶다.
  좀 새삼스럽긴 하지만 내가 느닷없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것은 다름아닌 설미때문이였다.
  《이 정도의 사진이면 되겠습니까? 제일 크게 나온건데…》
  설미는 공책크기만한 한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그속에서는 열매가 주렁진 감나무를 배경으로 두 녀병사가 활짝 웃고있었다.
  한명은 설미가 분명했고 다른 한명은 목깃의 령장만 다를뿐 어느모로 보나 친자매처럼 비슷해보이는 처녀였다.
  《이건 누구요?》
  《저의 첫 분대장동지입니다.》
  사진이란 추억으로 채색된 그림이다. 사진속의 붉은 감알들이 갑자기 어떤 활기를 부어넣어준듯 설미는 청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난 이 분대장동지에게서 수영을 배웠답니다. 학교에서도 끝내 배우지 못한것을 군대에 나가서 배웠습니다.
  소학교때 선생님이 날 물속에 밀어넣고 설미야, 배워준대로 어서 팔다리를 움직여야지 안그러면 넌 빠져죽는다, 선생님도 살려주지 않을테야 하고 막 꾸짖는데도 난 꼼짝 못했습니다. 하지만 분대장동지는 조용히 말하더군요, 수영을 못배우면 조국의 바다를 지키는 해안포병이 되지 못한다고…
  그 말이 죽는다는 말보다 더 무서웠던것같습니다. 글쎄 두달도 채 못되여 수영을 배웠으니까요. 참 이상하지요?》
  설미는 자못 생각깊은 표정으로 화판에 기대여놓은 사진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로서는 별로 이상할것도 없었다.
  병사는 조국이 안겨준 크고 신성한 의무로 하여 종종 자신을 초월하는 기적을 낳는것이다.
  문제는 설미의 말속에 어떤 비교대상처럼 묻어나온 소학교선생님이였다.
  결국 설미의 마음속에서 소학교선생님은 분대장처녀의 뒤자리에 놓여있었다.
  그 소학교선생님이 만일 어머니라면?
  어머니가 배워준 많은것이 낡은 흑백색사진같이 되였다면 분대장의것은 앞에 놓인 천연색사진처럼 선명하고 또렷한것이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지금껏 마음속에 무거운 빚을 안고사신건 아닐가?
  소학교선생님의 얼굴을 변변히 기억 못하는 한철명도 중학교를 다녔고 오늘은 어쨌든 대학생이 되였다. 그때 우리가 내린 결론은 한가지, 소학교교원의 노력은 매 제자들의 인생에 별로 큰 자욱을 남기지 못한다는것이다, 그래서 또한 쉽게 잊혀지기도 하는것이고.
  나는 문득 깨달았다. 소학교교육은 연필로 그리는 그림과도 같은것이였다, 잘못 그렸다가도 다시 지울수 있고 그우에 색만 잘 칠하면 누구도 알아볼수 없는…
  생각할수록 속이 허우룩해졌다. 하다면 지금 우리가 남의 웃음거리가 되면서까지 우화읽는 련습을 하고 허우대 큰 몸을 비틀며 춤가락을 배우느라 땀을 뽑는것은 왜 필요한가.
  《뭘 그렇게 생각합니까?》
  설미의 물음에 나는 생각에서 깨여났다.
  《아무것도 아니요. 그럼 어서 계속하오.》
  자신도 의미를 알수 없을 바보같은 웃음을 설미에게 지어보인 나는 화판우에 연필을 가져갔다. 이 모든게 다 공연한짓이라는 생각에 쫓기우며 나는 기계적으로 손을 놀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창밖에 땅거미가 진것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있는 우리를 위해 누군가 딸깍 불을 켜주었다. 금시 눈앞이 환해졌다.
  《은애동무로구나. 련습이 끝났니?》
  불을 켜준 녀동무에게 설미가 묻는 말이였다. 학생소년궁전 체육무용소조에 다녔다는 은애라는 그 동무는 다른 동무들을 도와주고있었다.
  《철명동지하고 학선동무가 아직…》
  무용수답게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얼굴마저 쪽 빠진 은애는 입술만 오물거릴뿐 대답을 피하였다.
  《못하겠다던?》
  설미는 벌써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런게 아니라 저…》
  나도 연필을 놓았다. 은애가 저렇듯 즘저릴 때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듯했다.
  한철명이 저 애리애리한 처녀의 닥달을 받으며 《매매염소가…》 하는 노래에 맞추어 장작개비처럼 꽛꽛한 팔다리를 너풀대려니 이 또한 헐치 않을것이다. 죽어도 이것만은 못하겠다고 아예 나자빠진건 아닌지.
  나와 설미는 약속이나 한듯 무용실로 향하였다. 한걸음 앞선 내가 복도끝의 널직한 문을 열어젖히니 드르렁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질려버렸다.
  《이건 도대체 뭐예요?》
  바닥에 퍼더버리고앉아있던 학선이가 불에 덴 송아지마냥 화닥닥 일어섰다.
  《좀 휴식하던…중입니다. 조금만 쉬자고 하더니 아예 곯아떨어졌습니다.》
  설미의 앙다문 입술이 열렸다.
  《배워주는 사람은 안타까와하는데…》
  정말 기가 막힌노릇이다. 나는 셈평좋게 코를 골고있는 철명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설미에게로 묻는듯한 시선을 보냈다.
  또다시 이 모든게 다 부질없는짓처럼 생각되였다. 설사 이렇게 최우등을 하면 또 어쨌단 말인가.